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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어조에 거부감을 느끼실 수 있는, 좀 쎈 시사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지자 우리는 분노했다. 유전무죄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우리가 과연 가진 게 없어서 시기와 질투심으로 분노했을까? 그 이면에는 정의라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침해와 더불어 심각한 사회적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갑질과 부당한 억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짐승처럼 살던 시대를 생각해보자. 그 때는 비록 사회를 이루지 않았기에 민주라는 개념은 없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평등한 사회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때는, 누구든 나쁜 짓을 하면 그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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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이나, 오늘 사형 선고를 받은 채 평생 교도소에서 호의호식할 이영학 같은 악마를 누구나 쳐 죽일 수 있었고, 때문에 평판이 지금보다 더 중히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시대가 과연 정의의 시대인지, 정말로 진보한 사회인지 나는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기 전에는 좀 더 평등한 사회였다. 하지만 사회를 이루고, 계급이 생기면서 불평등이 생겨났다.
옛날에는 1:1의 관계였다. 상대가 나를 죽일 수 있다면, 나도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그래서 서로 조심하고 평판을 관리하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가치가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런데, 불평등이 생겨났다. 1:1의 관계가 깨졌다. 누군가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을 해했을 때는, 그보다 더한 보복이 들어온다. 1:1로 죽는 게 끝이 아니다. 영화에서 부당한 대우로 인해 보스에게 대들던 부하는, 보스가 ‘너는 살려두고 대신 니 가족을 다 죽이겠다.’는 한 마디에 눈물을 흘리며 다시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계급사회에서는 1:1이 성립하지 않는다. 반란을 일으키면 혼자 죽지 않는다. 삼대가 멸족을 당한다. 나 하나 죽는 게 아니라 내 가족까지 당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1:1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민주사회라 할 수 없다. 근대 이전의 사회는 그렇게 불평등했다.
민주사회는 1:1이 기본이어야 한다. 사회적 계급에 관계없이 누군가 나를 때리면 나도 그를 때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적구제가 금지되었기에, 그에 걸 맞는 처분을 법이 대신하도록 위임을 한다. 그런데 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때렸음에도 그가 돈이 많거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런 사회는 이미 민주사회가 아니고 그 옛날 인간이 짐승처럼 살던 시대만도 못한 불평등 사회다.
상사의 갑질에, 욕설에, 폭행에도 불구하고 당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불평등을 이겨낼 힘이 없다. 당장 부당함에 저항하면 돌아오는 것은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다. 당장 밥줄이 끊기기 때문에 욕을 먹고 얻어맞아도 굽실거릴 수밖에 없다. 1:1이 통하지 않는다.
이건 저런 고상한 비유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아직도 여전히 1:1은 통하지 않는다. 상대를 죽이고 나 하나 죽이면 끝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평등해진다. 미국의 총기소유는 문제가 많지만, 적어도 평등 사회는 실현시켜준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총 맞아 뒤지면 끝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그래도 피부색이 다르거나 못 사는 사람이라 보인다 해서 얕잡아 보기는 해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바로 총알 날아올 걸 아니까.
총기보유가 허용되지 않는, 그리고 죽창을 들고 다닐 수 없는 한국에서는 그런 인식이 없다. 당장 상대가 저항하거나 반항하면, 더 크게 족치면 그만이다. 밥줄이 끊긴다. 가족이 굶어죽는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권에 밉보여서 사업이 망하고 밥줄이 끊긴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 분위기는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커리어, 직업, 밥줄, 미래.... 그것들을 저당 잡힌 채 1:1의 관계가 될 수 없었다. 상대가 부당한 짓을 해도 반항을 할 수 없었다. 저항하는 순간 보복이 들어온다. 사회가 그런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좀 나아지는 느낌이다.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전에는 폭로해봐야 보복만 당했다. 여검사는 좌천당했고, 꽃뱀으로 몰렸다. 그런걸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갑질과 불평등이 만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 구조에서 운전기사는, 청소부는, 조교는 욕먹고 쳐 맞고 참혹한 학대를 받아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힘의 불평등 때문에. 1:1의 보복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법도 구제해주지 않아서.
분위기는 조금 바뀐 것 같다. 그렇게 폭로해서, 비록 아직도 완벽히 보복이 없을 것이라고는 하지 못해도, 그래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용기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한 사람이 자신 혼자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서로 알리면서 알게 된 것이다.
정의가 바로 서기를 바란다. 1:1의 관계가 정립되기를 바란다. 상대의 계급이 어떻든 간에 내가 상대를 때리면 나도 상대한테 쳐 맞게 된다는 상식이 정립되기를 바란다. 이건희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웃으며 자유롭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요즘 사회에는,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을 보자면 물리적인 보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게 극단적인 경우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은 ‘밥줄’을 가지고 상대를 위협한다. 이른바 쥐꼬리만한 생활비를 주니 마니 하면서 생사여탈권을 쥐는 것이다.
당장 밥을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 조금의 돈 때문에 굽실거리고 욕먹고 쳐 맞고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당장 굶어 죽기 때문에...
나는 그래서 기본소득이 절실하다고 본다. 당장의 경제적 논리에 의한 생산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1:1로 모두가 평등하게 살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말이다. 그래야 월급을 주니 마니 하면서 쌍욕을 하는 상사에게 같이 쌍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놈에게 같이 폭력을 행사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정당한 보복을 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평등이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