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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비가 훑고 간 자리 위로
촉촉이 젖은 공기가 싱그러운 오후입니다.
낮게 깔린 먹구름도 이제는 다 지나가고,
걸음마다 찰박이는 도로 위로 상큼한 바람이 풀내음을 실어줍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의 이른 새벽처럼,
나는 당신의 늦은 밤을 봅니다.
피로에 지친 당신의 얼굴에
평온한 꿈이 계속되길 바라건만,
당신은 무엇이 그리도 괴로운지
이따금 얼굴을 찌푸리곤 합니다.
찌푸린 주름 사이로
우리 일상의 무게가 담겨있습니다. 그 무게가 가볍지 못함은
혹여 나 때문인 것은 아닌지,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부끄러워집니다.
한바탕 비가 훑고 간 자리 위로
아마도 향기 가득한 여름꽃이 피겠지요.
당신의 꿈도
그렇게 향기롭길 바라며,
오늘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잠들길 바라봅니다.
1년 간 백수시절을 보내며 아내에게 의존했던 나는, 그 시절 아내의 이른 새벽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내가 잠든 늦은 밤, 아내의 잠든 얼굴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던 그 시간만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에 무엇을 더 덧붙여야 내 마음을 오롯이 전달할 수 있을까. 미안하다, 고맙다, 부끄럽다, 사족이 되어버리는 말에는 무게가 실리지 못하고 신발에 엉겨붙은 껌딱지 마냥 질척이기만 하다. 몸에 묻은 때를 벗겨내듯 당신에게 전하는 말을 매만지고 나면, 결국 남는 단어는 사랑한다 단 한 마디 뿐이다.
이른 새벽, 함께 출근길을 나서며 현관 앞에서 살포시 나누는 짧은 입맞춤이 소중하다. 오늘도 무사히 저녁을 맞이하면 우리는 따듯한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지친 하루의 일상을 미주알 고주알 쏟아놓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마저도 감격스러운 행복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