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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본적으로 남의 불행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불행을 다루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남의 불행을 다루는 것은 상당히 거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불행을 다루기 위해서는 몇가지 고려해야할 사항을 생각해보곤 한다. 내 경우에는 일정부분 노이즈를 주거나 모호화하는 선에서,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딱 필요한 만큼만 차용하는 편이다.
일전에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셨던 분으로부터 이런말을 들은 적이 있다.
> 내가 이번에 아프고 나서, 사용한 비용에 대해 실비 보험 처리를 했더니, 딱 그만큼 돈이 나오더라. 그런데 참 슬펐어. 왜인지 아니? 이게 내 목숨값 같이 느껴졌거든. 내 목숨을 팔아서 번 돈 같이 느껴지는 거야. 그러니 기분이 좋지 않더라구.
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수치로 환산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작업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아픔에 가격이 매겨지는 일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에서, 당신은 얼마짜리 아픔이니까 이정도 입니다. 라고 낙인을 찍는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일까. 이러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곤 하지만, 최소한 나는 그러한 의미로 변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한번쯤 경계하곤 한다.
또한 나는 사실 나의 불행에 대해서도 얼마나 주체적으로 잘 다룰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불행을 어딘가 늘어놓는다는 것은, 나 스스로 마음이 편해지고자 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공감이나 위로를 바라기도 하기때문일텐데, 사람마다 삶의 경험의 깊이와 방향이 다른 것이어서, 결국 각자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방향의 공감과 위로를 마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면서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고 결국 마주하지 못한다면 또 어떻게 해야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나의 불행을 내가 결정할 수 있을 정도 - 주체적인 불행의 내어놓음 - 만큼만 나누고 싶을 때도 있는데, 내 손을 벗어나게 되면 어찌 될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불행에 있어서도, 가급적이면 안전지대를 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 손을 떠난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비추어질지, 방향성은 짐작하면서도 실제로 구체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내 의도와 다르게 마구마구 증식하거나 사그러들기도 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각자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는 각자의 손에서 주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의 불행을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불어 남의 불행을 마치 자신의 불행인 양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러려니 이해를 한다. 왜냐하면, 남의 불행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무게가 와닿지 않아서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경험이 쌓이다보면 언젠가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조금 어렵다. 나는 이러한 것에 대해, 삶을, 삶의 불행을, 삶의 아픈 경험을, 도둑질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오롯이 껴안을 자신도 없으면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척하며 도둑질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누구든 모르지는 않을터, 나는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게 되면, 언제나 안타깝다.